무기력증이 도졌다.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을 하고, 샤워하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힘차게 출근하는 게 전과 같이 즐겁지 않았다. 일이라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즐겁지 않게 된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사실 일이라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다기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소속감, 성취감이 나에게 더 많은 의미를 주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그사람이 행복해하며, 제품을 통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인정까지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 삶의 의미를 찾느라 발버둥 치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카뮈가 말한 “부조리”를 느끼는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신입으로서 어떻게 보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전공을 바꿔 취직했고, 제대로 된 인턴 한번 못해봤으며, 그렇기에 업무 프로세스, 개략적인 업계가 돌아가는 방향, 실무 능력 등 모자란 게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당장의 업무를 해결하는 것이 보다 급선무인 것 너무나도 잘 안다. 나 역시 그런 판단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이런 무기력증을 느끼는 건 결국 나에 대한 실망감으로부터 온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그 이상을 마치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오아시스와 같은 것으로 만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소속감, 동질감과 같은 감정은 그 무엇보다 행복을 주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다. 그리고 이는 함께 목표하는 무언가를 헤쳐나갈 때, 혹은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고충을 자연스레 이해하면서 생긴다. 그 무리에 끼기 위해서는 그 무리에 그런 직간접적인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그들과의 정서적 교감이라면, 먼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 대가를 치를 자신이 없다면 그건 내가 덜 아쉬워서, 덜 간절해서 그렇다. 배가 부른 거다. 세상은 시장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보여주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명한 이치다.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오히려 이런 감정을 느끼고 힘든 이 순간이, 비로소 나를 증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특정 집단에서 내 존재 이유를 생각하는 시점에, 그 이전의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면 지난 시간에 굳이 후회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레 찾아오는 시기가 도래한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찾아오는 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무기력함, 긴장감을 오히려 내 삶에 새로운 성장을 가져오는 좋은 잣대로 삼으려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삶을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간절하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며 믿을 수밖에 없다. 가까이서 보았을 때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묘화가 결국 멀리서 보았을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그랬다. 감정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은 곧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현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행할 뿐이다.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멈춰있을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나의 판단과 행동을 믿는 것뿐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답은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