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불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몸이 밀릴 정도의 강한 비바람이었다. 더워서 열었던 창문까지 닫아야 할 정도였다. 바깥에 풀들도 그 강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럼에도 곧게 뻗은 나무는 본인의 단단함을 자랑하듯 꼿꼿이 서있었다.
다음날 출근길에 어제 흔들리던 식물들을 보았다. 굳건히 서있던 나무가 부러져 있었다. 그에 반해 세차게 흔들리던 풀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문득 흐르는 대로 살으라는 유명한 문구가 떠올랐다.
흐르는 대로 살라는 말은 나에게 반항심을 느끼게 했었다. 세상이 주는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수긍하고, 이에 대해 포기하라는 핑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처럼 토지, 혹은 권력을 가진 귀족이나 왕의 노예 혹은 하인처럼 그 시스템을 온건히 순응하고 산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린다면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러지지 않기 위해 단단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맞다고,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잣대를 남에게 씌우기도 해 봤다. 점점 모난 사람으로 되어가는 내가 느껴졌다. 그럴수록 불행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났다. 누구보다 사회적 성공을 거두신 그분은 이런 나의 모난 질문들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라는 태도로 나를 마주해주셨다. 자신의 철학과 다를 수 있음에도 이를 포용하는 여유를 보여주셨다. 그때 진정한 단단함은 이런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단단하다는 것은 곧 포용하는 힘이 부족함을 견지한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적용되는 말이지만, 타인이 나를 보았을 때도 그러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과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대화 속에서 사용하는 단어, 외적으로 보이는 분위기, 경제적, 사회적 위치, 드러나는 성격 등을 본능적으로 캐치한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자세보다 고집을 내세운다면 그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무리라고 생각하기를 접는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부드러움이 세상을 살아가는 옳은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조리에 반항하는 자신만의 고집이 어느 정도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나와 분명 다른 생각, 그리고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히 옳지 않은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철학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철학을 버릴 필요는 없다. 내 생각이 확고하다면, 어떤 말을 해도 그냥 의견일 뿐이다. 오히려 고맙다.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부드러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물이 흘러가는 부드러움, 실크와 같은 원단을 만졌을 때의 부드러움. 나는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풀과 같은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 되고자 한다. 분명 자신의 정체성을 꿋꿋이 드러내나, 여러 흔들림에 자신을 어느 정도 놓아주고 수용할 줄 아는, 그런 단단함을 가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